- 나라사랑 심성봉운동을 하게 된 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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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나라사랑 心聖奉 국민운동을 하게 된 동기
"우리 모두 새 마음운동, 성결운동, 봉사운동을 전개하여 21C투명한 인류복지나라를 길이 후손에게 물려줍시다. "
눈물이 없이는 읽을 수 없는 우리민족의 오천년의 유구한 고난의 발자취엔 그때 그때마다 슬기롭게 생명과 재산을 바친 분들에 의해 꿈꾸는 것 같은 1945년 광복의 기쁨을 안고 우리민족의 격동기에 소생 출생하였으나 1951년2월2일 에야 호적하였고 1960년대까지도 모두들 이름 없이 가난했던 우리 모두의 가난의 恨이 그랬듯이 저에게도 고학시절 3년간 한 맺힌 기도가 있었는데 우리민족의 기쁨을 안고 해방둥이로 태어나 구사일생 죽지 않고 살아 서울 백사장에서 단신으로 고학시키시는 하나님, 이여자 중에 여자 같고 만삭되지 못한 가운데 낳은 자 같은 고학생의 기도제목은 “가난한 우리민족을 위해 제가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기도는 타인과 대화할 시간외에는 언제나 이 기도에 전념이 되어 그 당시 2원 50전하는 전차 안에서도 버스 안에서도 길을 걸어갈 때도 그칠 줄 모르는 간절한 소원의 기도였답니다. 한편, 이 기도를 전념하다보면 고학할 물건 때문에 남대문시장 삼복철물 등에 들려야 할 텐데 종착역인 동대문역에 와 다시 전철을 타고 남대문시장을 가야되는 일이 종종 있었답니다. 이렇게 쉬지 않고 집중 기도하기를 2년이 지난 1966년3월1일, 버스 안에서 종전과 같이 기도할 때 하늘의 음성이 제 마음속에서 들려오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아들아!” “너의 나라는 지금은 가난하지만 장래에는 잘사는 나라가 오느니라!” 하시지 않겠습니까? 이 말씀을 하시면서 “너는 앞으로 도래할 잘사는 나라를 길이 후손에게 물려주는 일을 위하여 心聖奉 운동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마음의 음성을 신에게서 듣고 얼마나 환희의 눈물을 흘렸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때의 저의 현실은 지렁이 같은 고학생 힘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고학생으로서 이 엄청난 운동을 할 수 있는 환경이나 여건 등등 모든 면에서 할 수 없는 그지없는 고학생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눈물을 흘리면서 날마다 부정의 기도를 할 수 밖에 없었답니다. 저는 이렇게 부정의 기도를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첫째; 대통령이 대통령령으로 할 수 있고요, 둘째; 정치가가 정치입법으로 셋째; 학박사가 학을 전개하여 넷째 ; 돈 많은 실업인등이 학교를 지어 부강한 나라운동을 할 수 있는 것이지, 앞으로 봐도 뒤로 봐도 1%의 가능성이 고학생인 저에게는 없습니다. 저는 못합니다.”라는 기도를 약 3개월 이상을 자나 깨나 계속 부정의 기도를 반복하면서 못하는 이유를 기도하던 중, 어느 날 갑자기 또다시 신의 음성이 제 마음속에서 강하게 들려오지 않겠습니까? ...
0,의 음성은 지금엔 책망하시는 말씀으로 “사랑하는 아들아! 그 일을 진정으로 할 수 있는 사람은 네가 말하는 대통령이나, 정치가나, 학박사나, 돈 많은 실업인 만이 아니라, 밀알사명을 받은 연약하고 연약한 네가 해야 되느니라!” 하시면서 제 가슴에 벼락을 치듯 못 박지 않겠습니까? 그 때 저는 또다시 환희와 뜨거운 마음을 체험하고 신에게 압도적으로 굴복당하는 은혜를 체험하고 “그렇다면 순종하겠습니다.” 고백하지 아니할 수 없었답니다........... -이하생략 -2. 나라사랑心聖奉창립대회(새 천년 삼일절에)
그 후, 저는 이작은 가슴에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사명의 열정이 지금까지 48년의 세월 속에 휴가나 명절이나 밤낮없이 오직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제 자신을 제일 낮은 곳에 처하는 삶을 주셨을 뿐 아니라 가정의 행복을 제대로 이룰 수 없는 생의 삶을 주시어 계속 산 순교자적 삶을 주시어 고난에 고난 속으로의 삶을 주셨지만 이 사명은 죽는 순간까지 버릴 수가 없음은 진실로 현 시대적으로는 미친 정신이라 사료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사명 때문에 부족한 저는 생사를 걸어보아도 혼자의 힘으로는 이룰 수 없는 사명임을 알면서도 그 동안 이 사명의 일환으로 사회복지법인 꿈동산복지타운 등을 이루었으나,
저는 이 사명을 감당하지 못한 채 1997년 우리민족에게 닥친 IMF가 터지자 나는 사명자로서 무엇을 했단 말인가? 나 자신을 반문하면서 그 극복을 위한 혼자 밤을 지새우며 황막한 천안 변두리 현지에서 약 330㎡의 건물을 손수 증축 및 개보수하여 가칭 국민복지 수련원을 마련하였으나 우리교단 유지재단에서 승락도장을 찍어주지 않아 이로 인한 갖은 역경의 역경을 거듭하면서도 나라사랑 심성봉 국민운동의 旗를 만들고 새마음 운동 뺏지, 성결 운동 뺏지, 봉사운동 뺏지 등을 만들고, 손수홍보물등을 제작하여 왔으나.투명사회운동 여파로.수년간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라사랑의 사명의 뜻은 저버릴 수 없어...
새천년 3.1절에 드디어 나라사랑 심,성,봉 국민운동 창립대회를 우여곡절 끝에 독립기념관 겨레의집에서 갖게 되어 발기인 33인등과 회원 약 150,여명의 서명을 받았을 뿐 무로 돌아가 산 순교자가 돼야 한다는 밀알정신엔 고난에 고난이 따를 수밖에 없으면서도 회원들에게 서신 한 장 못하고 창립대회 시 가칭 국민복지관 기공식후 온 식구의 그동안 모은 조력으로 왕복4차선 광풍로개설로 천안시 에서는 위험하니법인건물 헐고다시지어줄것 동려햇으나......나사랑의사명자로서 건물의 붕괴를 막기 위하여130평의 건물을 자력으로 시민을 위한 복지관의 부대시설을 마련하였으나 우리 모두 새마음 운동 성결운동 봉사운동을 전개하여 21C투명한 인류복지의 나라를 길이 후손에게 물려주자는 슬로건에도 불구하고 주무청의허가를 받지 못하여 1년을 기다리다 현재까지 임시교회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교인도 별로 없는 아골 골짜기 같은 황무지에서 부천 누님이 가져다주시는 헌옷을 입으면서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주야가 없는 일들의 역사 속에 시대적으로는 하늘 뜻 밀알의 길로 현재의 일들을 주님이 함께 하셨기에... 지금까지 가족의 반대에도 아랑 곳 없이 가정으로 부터의 아픔과 고독 속에서도 2005년 사회복지법인 꿈동산복지타운(꿈동산어린이집 천안제일요양원)으로 다시2008년" 나라사랑 복지재단"으로의 역사는 하늘이 주신 사명과 섭리와 인도하심과 함께하심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오늘의 사회현실에 반하는 사명의 수행은 비참하지만 그렇다고 버릴 수 없는 사명의 열정 때문에 지금까지 가문적으로는 고려 때 문하시중, 곽경, 시조님의 29대손이며 18대"홍의장군" 망우당" 곽재우, 장군님의 삶을 본받는 후손으로, 이충무공의 후예가 되고자, 덴마크를 빚낸 공병대령 달가스, 덴마크의 정신적 지도자 크룬투비 목사와 같이 국가부흥과 국민정신운동을 위하여 비우고 낮아지는 생활신앙이 저의 과거와 현재의 고난생애의 현주소라 하겠습니다.
돌이켜보면 상기 사명을 받은 후 53년을 학문을 연구하고 물질 등 저의출세를 위한 길에 이같이 몰두하였더라면 박사학위 몇 개쯤과 부를 넉넉히 축적했으련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 "우리 민족의 무궁한영광을 위하여 "밀알 사명을 이루기 위한 생사를 걸고 고학으로부터의 무에서 유를 창조한 부천에서의 사업이 사명의 여파로 1977년 제 나이33년에 (주님의 일생재현의뜻 )한을 남긴 채 패망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이사명은 끊을 수 없어 사유재산 공 개념을 계속 실천함은 이제는 가족도 계속 반대하는 아무도 이해할 수없는 고독하고 험난한 사명의 길은 밀알 사명을 받은자가 아니면 그 누구도 스스로는 갈 수없는 인간적으로는 불쌍한 사람입니다.
저는 아직 그 무엇 하나도 우리 모두를 위하여 이루어 놓지 못한 현실이나, 사명자는 사명을 다하기까지 죽을 수는 없는 것일까?.죽을 시간이 없을 뿐일까?
그동안 넷 차례, 의식을 잃고 쓰러져 그때마다 육체의 한 부분씩 결함이 와도 건재해 있음에 감사하며 그러기에 사명은 생명보다 귀한 것으로 알고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오직 한길 사명에 잠 못 이루는 일하는 목사, 시대적으로는 버림받은 사람입니다.
"내가 사는 까닭"의 밀알사명과 나라사랑 심성봉 국민운동은 소생의 끊을 수없는 민족적 사명이라 하겠습니다. -이하생략-
끝으로 나라사랑. 심.성.봉 국민운동이란? 을 꼭 참고해보시고 범국민적 운동을 갈망하오며"각계 지도자님의 세계인류복지 나라를 위하여" 생명까지 바치고자 한지 오래인바 지도편달을 앙원 합니다. 서울흑석동 190번지 고학으로부터기록.1964년.2월.18 일- 2019. 8. 15 .섬기는 사명자 곽명식 배상